노후 준비 계좌가 ‘억만장자의 금고’가 된 이유… 미국 IRA를 둘러싼 논란

“노후를 위한 제도가 부를 더 크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면, 과연 그 제도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은퇴 후 안정적인 삶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있다. 미국의 개인퇴직계좌(IRA, Individual Retirement Account)가 바로 그것이다. 원래는 평범한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세금 혜택을 제공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는 이 IRA가 초부유층의 절세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세금 부담 없이 불려온 사례들이 잇따라 알려지면서, 제도의 공정성 자체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평범한 은퇴 계좌에서 ‘억만장자 계좌’로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IRA 잔액이 2,500만 달러를 넘는 사람이 1,000명을 돌파했다.
불과 5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더 놀라운 것은 IRA와 기업형 퇴직연금인 401(k)를 합쳐 1억 달러 이상을 보유한 사람이 약 200명에 달한다는 점이다.
노후 생활비를 준비하기 위한 계좌가 이제는 거대한 자산을 보관하는 또 다른 투자 플랫폼이 된 셈이다.
비밀은 ‘상장 전 투자’
이들이 엄청난 자산을 만든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기업이 아직 유명해지기 전, 매우 낮은 가격에 비상장 주식을 IRA 계좌 안에서 매입한 뒤 기업이 상장하면서 주가가 폭등하면 그 수익이 계좌 안에서 계속 성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일반 투자자가 상장 이후 주식을 사는 것과 달리, 창업자나 초기 투자자는 기업 가치가 거의 없던 시점부터 투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장의 대부분이 세금 혜택 계좌 안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시간과 복리, 그리고 세제 혜택이 결합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자산이 만들어졌다.
로블록스 창업자의 사례
대표적인 사례는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Roblox) 창업자다.
그는 상장 전 주당 72센트에 약 200만 주를 IRA에 담았다.
기업이 상장하고 가치가 급등하면서 그의 IRA 계좌는 6,800만 달러 이상으로 성장했다.
미국 평균 가구의 IRA 잔액과 비교하면 수백 배에 달하는 규모다.
엔비디아 투자로 20억 달러를 만든 사례
실리콘밸리 투자자로 활동했던 텐치 콕스(Tench Coxe) 역시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엔비디아와 스노우플레이크 초기 주식을 IRA 안에서 보유했고, 현재 해당 계좌의 자산은 20억 달러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엔비디아 주식을 일부 매도하면서도 수천만 달러의 세금을 절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주식을 보유했더라도 일반 증권계좌였다면 상당한 양도소득세가 발생했겠지만, IRA의 세제 혜택 덕분에 그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것이 정말 ‘제도 악용’일까?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이들은 불법을 저질렀을까?
답은 아니다.
대부분은 현행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투자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논란의 핵심은 탈세가 아니라 제도 설계에 있다.
처음 IRA가 만들어질 당시 입법자들은 일반 근로자의 은퇴 준비를 상상했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이 제도를 활용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법은 그대로인데, 투자 환경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결국 복리는 누구 편일까?
많은 사람들은 복리의 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복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다.
바로 세금이 없는 복리다.
매년 세금을 내면서 투자하는 것과, 수십 년 동안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투자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부자들이 단순히 좋은 종목만 골라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세금을 최대한 늦추거나 줄일 수 있는 구조 안에서 복리를 극대화했다는 점이 이번 사례의 핵심이다.
투자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세금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이 자산 격차를 더욱 벌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 정치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논란이 커지자 미국 정치권도 규제에 나섰다.
민주당 의원들은 은퇴계좌 잔액이 1,000만 달러를 넘는 경우 일정 금액을 매년 의무적으로 인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노후 준비를 위한 제도가 초부유층의 무제한 절세 창구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법안이 통과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미국에서도 ‘세금 혜택의 형평성’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새롭게 등장한 ‘트럼프 계좌’
한편 최근에는 이른바 트럼프 계좌가 또 다른 장기 절세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녀 명의로 장기간 자산을 운용하고, 이후 Roth IRA로 이전하면 수십 년 동안 투자 수익이 비과세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구조다.
일부 전문가들은 장기간 운용할 경우 은퇴 시점에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자산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평가한다.
다만 이러한 전략 역시 장기적인 제도 변화와 세법 개정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마무리
이번 논란은 단순히 “부자들이 세금을 적게 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부는 투자 수익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금과 제도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후 준비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산 증식의 핵심 도구가 되었고, 그 혜택은 정보와 기회를 먼저 가진 사람들에게 더 크게 돌아갔다.
투자는 결국 좋은 종목을 찾는 경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좋은 제도를 이해하는 경쟁이기도 하다.
앞으로 미국이 이 제도를 어떻게 손질할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어떤 교훈을 얻게 될지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금융 이슈가 될 것이다.